누마즈 시가지의 옛 모습을 엿볼 수 있는 누마즈 성 및 산마이바시성의 역사와 흔적

2021. 3. 28. 07:00시즈오카 누마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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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마즈 역이 위치한 지역은 오오테마치(大手町)라고 불린다. 전국 각지에 처져 있는 지명이 오오테몬(大手門)에서 유래한 점을 고려하면, 성과도 관련이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시가지를 둘러 보면 비슷한 것도 없다. 하지만 오래전에는 성이 있었다.

 

누마즈 시가지가 근현대 들어 굴곡이 많았음에도 지도를 보면 도로의 형태 등으로 어느 정도 규모를 짐작할 수 있기는 하다. 작다면 작고, 크다면 크다고 할 수도 있는데, 그 정도 크기도 성이다. 오사카 성이나 히메지 성 정도 되어야만 성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누마즈 시가지에서 성의 흔적을 그나마 가장 많이 간직하고 있는 곳은 오오테마치 남측에 자리한 중앙공원(中央公園)일 것이다. 곳은 과거 누마즈 성과 산마이바시 성의 혼마루가 있었던 곳이다.

 

공원 앞은 카노가와(狩野川)라는 강이 흐르는데, 없던 강이 갑자기 생겼을 리는 없으니, 당시에도 강을 끼고 있었던 성임을 있다. 혼마루는 강에 접해 있었고, 공원 북쪽, 지금의 오오테마치 일대에 니노마루가 위치해 있었다.

 

 

경우에 따라서 일대에 들어선 성을 누마즈 성(沼津城)이라고도 부르며 산마이바시 성(三枚橋城)이라고도 부른다. 두 성은 서로 다른 시기에 축성되었으며, 그 목적도 상이한데, 위치가 비슷한 데다, 문헌 등으로 미루어, 두 성의 명칭은 분명하게 구분되어있다고 볼 수는 없다.

 

일반적으로는 근세에 축성된 누마즈 성과 구분하여, 중세에 축성된 성을 산마이바시 성이라고 한다. 산마이바시 성의 성곽은 20세기 후반의 발굴조사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데, 일부는 카노가와 강변 제방의 벽면의 일부를 이루고 있으며, 누마즈 리버사이드 호텔과 아고라 누마즈(アゴラ沼津) 등에도 그 일부가 복원되어 있다.

 

산마이바시성의 축성 경위를 알기 위해서는 누마즈의 지정학적 위치를 살펴보아야 한다. 전국시대, 지금의 시즈오카 중서부에 해당하는 토토미 국(遠富)및 스루가 국(駿河国) 일대는 이마가와(今川氏)의 세력하에 있었는데, 북쪽 카이 국(甲斐国)에는 다케다씨(武田氏)가, 동쪽 이즈 국(伊豆国)에는 호죠씨(北条市)세력이 대립하고 있었다.

 

그러나 요시모토 사후 일대의 힘의 균형이 깨지면서, 스루가 국은 다케다 씨의 세력하에 놓이게 되었고, 누마즈는 이 스루가 국의 동단에 위치해 있었다. 이리하여 이즈 일대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호죠씨와 경계를 맞대고 대치하던 시기에 산마이바시 성은 축성되었다.

 

그 다케다 씨도 이후 서쪽의 도쿠가와와 오다 씨의 연합군에 의하여 스루가를 내 주게 되고 산마이바시성은 함락되었다. 이후 누마즈 번이 성립,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부하이던 오오쿠보 타다스케가 초대 번주가 되나, 후세가 없어 사후 산마이바시성은 폐성된다.

 

 

이후 에도 시대에 이르러 미즈노 씨(水野氏)가 새로이 이어받게 되어, 논밭으로 개간이 되어버린 산마이바시성의 북측에 누마즈 성이 축성되는데, 시대가 바뀌어 전쟁보다도 행정적인 측면이 더 강했던 누마즈 성은 규모도 산마이바시 성에 비하면 작았다.

 

이렇게 누마즈 성은 19세기 후반 미즈노가가 지금의 치바 번에 자리하였던 키쿠마번으로 이봉되면서 폐번이 되었고, 이후에는 누마즈병학교가 성내의 건물을 활용하여 쓰였으나, 이후 도쿄로 옮겨가면서, 성의 구조물은 민간에 불하되어, 성의 흔적은 거의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

 

 

격동의 근현대사를 거치며 거대한 성채가 들어서 있던 누마즈 시가지의 모습은 일변하였지만, 옛 성의 흔적은 곳곳에 남아 있다. 누마즈 중앙공원을 비롯하여 여러 곳에 남아있는 성체의 유구와, 산마이바시성 축성 당시 파낸 흙을 쌓아올렸다는 아게츠치쵸(上土町)나 오오테마치(大手町) 등의 지명에까지. 일견 놓치기 쉽지만,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으니, 누마즈 시가지를 거닐면서 지난 역사의 흔적을 찾아보는 것도 귀중한 경험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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