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3. 7. 07:00ㆍ일본여행
하네다 공항 1터미널에 도착했을 때의 첫인상은 여느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다만 나 혼자만이 이 곳에서 대단히 지쳐 있다고 느꼈지만, 이는 대단한 착각일 뿐이다. 공항에서는 항공편의 연착에 대한 방송이 이어서 나오고 있었고, 곧 짐을 맡기러 항공사의 창구를 찾았을 때, 예약한 항공편의 목적지 사정으로 인하여 수속이 도중 중단이 되는 지경이 되자, 다시 긴장감은 높아졌다. 원래 예정된 항공편을 탔더라면 좋았을 테지만, 이전 항공편으로 바꿔 타는 선택도 나쁘지는 않았다. 아니, 애초에 선택지 같은 건 없었다. 이른 아침부터 이와 같은 상황을 예견하고 있었기에, 나에게는 더 이상 부릴 여유가 남아있지 않았다.
수속을 마치자마자 재빨리 들어간 게이트 안에서 자리를 잡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나와 비슷한 처지로 보였다. 그럼에도 한편으로는 무사히 목적지까지 갈 수 있게 된 것 만으로도 감사해야 했다. 예정된 일정은 불가피하게 변경을 하여야 하였지만. 기내는 조용했고, 편안하게 목적지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탑승교를 나와 컨베이어 벨트 앞에서 수화물을 기다리고 있을 때도, 당초의 기대와는 다른 기분을 가지고 있었다. 이 곳에 도착하는 것은 나름의 사명감이 필요한 일이었다. 곳곳을 벽을 북해도임을 알리는 광고판과 장식들은 여행객의 기대를 북돋워 주기보다는 그저 나에게 주어진 책임을 독촉하는 사인으로도 보였다.
저번 주도 그리고 이번 주도, 출발하기 전날까지도, 북해도의 날씨는 좋지 않았다. 눈이 좀처럼 오지 않는 지역에서, 눈이 지겹도록 내리는 지역을 바라보게 되면 마냥 나쁜 감정만이 들지는 않겠지만, 감상에만 오롯이 젖을 수 있을 정도가 아니었다는데 있었다. 뉴스에서는 연일 '기록적'이라는 말과 함께, 폭설로 인해 마비된 교통과, 사고 소식들을 전하고 있었기에, 내심 이 날만은 그렇지 않기를 바랐으나, 기적이란, 그저 무사히 이 곳에 내리는 데서 그친 것 같았다.
열차는 밤 10시가 되어야 운행을 재개한다고 하였다. 선로에는 눈이 승강장 높이만큼 쌓였다고 하는데, 제설 작업이 순조로울 리가 없었다. 이미 전날, 전 열차가 운행을 멈추었고, 같은 달 초에도 동일한 사유로 인하여 열차가 10일이 지나서야 가까스로 운행을 재개한 전력이 있었다. 적어도 삿포로 방향으로는 가장 수월한 진입 수단이 열차이기에, 지하로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 앞을 시작으로 사람들은 길게 줄을 늘어섰지만 결국 열차는 10시가 지나서도 운행을 하지 못하였고, 줄을 선 사람들은 그 대로 자리에서 주저앉아야 했다.
교통수단은 버스도 마찬가지였다. 삿포로 행 버스는 호쿠도 교통(北都交通)과 홋카이도 츄오 버스(北海道中央バス)의 노선이 있으나, 전부 운행을 멈추었고, 출발하는 버스들도 대부분 치토세 행으로, 그마저도 만차였다. 한국에서는 좌석이 다 들어차도 입석으로도 승객을 받는다고 하던데, 일본은 그런 나라가 아니다. 승객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무리한 승차는 기대를 하지 않는 편이 더 좋다. 결국 떠나는 버스도 그림의 떡이었다.
뒤이어 들어오는 비행기도 대부분 결항 혹은 연착이 되었다. 활주로는 이용 가능하여도 혼잡을 이유로 지연이 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북해도에 온 것을 환영한다지만, 공항 밖으로 빠져나갈 수가 없으니, 눈 앞에 보이는 홋카이도 맥주 박물관과 삿포로 클래식이 무슨 소용일까. 그럼에도 포기를 할 수는 없었으니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만 하였다.
마지막 남은 희망은 택시였다. 일반적으로 공항에서 삿포로 시내까지는 만사천엔 정도가 소요된다. 버스나 열차에 비하면 압도적으로 비싼 가격이기는 하나, 이날처럼 물불 가릴 새가 없는 상황에서는 택시라도 타고 가는 데에 만족을 해야 했다. 그래서 택시를 타기 위해 기나긴 줄을 섰다. 공항 안에서 시작된 줄은 바깥으로 택시 승강장 까지 이어져 있었다. 이 날 바깥 기온은 영하 9도 정도였고, 그나마 바람이 불지 않아서 버틸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택시도 탈 수 있다면 다행인 수준이었고, 수 시간을 기다려도 택시 잡기는 요원하였다.
한편 공항 내에서는, 발이 묶인 승객들이 너도나도 공항 안에 자리를 잡고 노숙을 준비하고 있었다. 공항에서는 다행히 국제선 게이트까지 열어두면서 3층을 제외한 전 층을 열어두어서, 모포와 매트리스 등을 제공하였다.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서, 승객들은 조금이라도 상황이 호전되기를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눈 앞에 펼쳐진 상황을 받아들이고, 체념한 듯 자리를 잡은 사람들이 모인 2층 로비에서, 직원들로 보이는 사람들은 종종 물자를 옮겼고, 간혹 경찰들이 순찰을 돌기는 했다. 사람들은 이따금씩 담소를 나누었고, 바깥에 비하면 비교도 안 되게 따뜻한 공항에서, 사람들은 절망적인 시간이 조금이라도 빨리 지나가기를 빌었을 것이다.
북해도니까, 이런 상황은 충분히 있을 법 하다고 여길 수는 있으리라. 그러나, 이번 겨울은 도민들 뿐만 아니라, 홋카이도를 찾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재앙적이었다. 변덕스러운 날씨 앞에 열차는 무기력하게 운행을 멈추었고, 버스는 잡을 새도 없이 앞서 도착한 승객들을 실어나를 뿐이었다. 공항 바깥의 세상이라고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었다.
연일 계속되는 폭설에 홋카이도의 교통은 한참 전부터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이 날과 같은 상황도 어느 정도는 예상이 되었다. 그러나 오전까지만 해도 제설이 제대로 되지 못해 겨우 비행기를 띄우던 신치토세 공항의 모습에 절망하면서도, 가만히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당일 항공편을 바꿔가면서까지 북해도 행을 강행하였던 것은 나의 착오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적어도 변덕스럽기 짝이 없는 자연에 대한 오만은 없었으니까. 다만 장소를 불문하고 쌓인, 그리고 그칠 만 하면 내리는 눈의 유혹에 졌을 뿐이라고 해 두기로 하였다.
그리고 시간은 새벽이 되었고, 공항에 내린 이후 6시간이 지나서야 가까스로 공항을 탈출할 수는 있었다. 제설은 공항에서도, 그리고 삿포로로 향하는 도로에서도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짧은 시간 동안 삿포로로 갈 길을 생각하는 동안에 피곤함이 뒤늦게 몰려왔지만, 숙소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긴장을 풀려고 하여도 풀 수가 없었다.
새벽의 삿포로 시가지는 인적도 없이, 불빛만이 거리를 밝히고 있었다. 도로와 인도의 구분을 무색케 하는 눈의 방벽을 따라, 숙소로 걸음을 재촉했다. 늦은 시간이었음에도, 깊은 잠은 청하지 못할 것 같았다.
'일본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노보리베츠온천 타키모토칸에서 보낸 짧았지만 꿈같던 시간, 그리고 다시 삿포로로 (0) | 2022.06.22 |
---|---|
삿포로에서 노보리베츠까지 가는 길 - 폭설은 그쳤지만 가는 길은 험난했다 (0) | 2022.03.12 |
겨울 유자와 여행 2편 - 타카한 료칸에서의 하룻밤, 그리고 돌아가는 길. (0) | 2022.01.27 |
겨울 유자와 여행 1편 - 눈의 고장, 유자와마치의 정경 (0) | 2022.01.26 |
도쿄 서부의 가을 명소 3 - 미타케산 2편 (무사시미타케신사, 그리고 나나요 폭포) (0) | 2021.12.25 |